“정말 이것이 신학자 교수님들의 생각, 맞습니까?” (명성교회 작은 성도 박태엽 올림)

예장통합뉴스 | 기사입력 2019/11/14 [01:05]

“정말 이것이 신학자 교수님들의 생각, 맞습니까?” (명성교회 작은 성도 박태엽 올림)

예장통합뉴스 | 입력 : 2019/11/14 [01:05]

 

 

▲     © 예장통합뉴스



 

 

“정말 이것이 신학자 교수님들의 생각, 맞습니까?”

-302인 신학자님들 성명서에 대한 명성교회 작은 교인의 개탄-

요즘은 놀라는 것이 너무 많아 사실 놀랍지도 않습니다.

2019년도 저물어 가는 11월 어느날 국내의 여러 저명하신 신학자 교수님들 302인이

우리 명성교회에 대한 성명서를 내셨더군요.

먼저 개탄스럽습니다.

아니 비통한 심정입니다.

교수님들, 과연 교수님들에게 한국교회의 앞날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교수님들에게 맡겨진 한국교회 미래의 자산들의 황폐화에 어떤 책임을 가지고 있으십니까?

앞으로 닥쳐올 혹독한 목회 환경이 눈앞에 보이는데

언제까지 스스로 만든 정의라는 독배에 갇혀 있으시렵니까?

한 교단의 결단으로 결정한 총의가 그대들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입니까

작금의 행동들이 혹시 정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집착증이라고 한번쯤 생각해 보셨습니까

먼저 묻겠습니다.

성명서를 보면 서두에『..이 수습안을 통과시키므로 목회직이 신분제처럼 세습을 용인하고 말았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정말 이 표현, 교수님들이 하신 표현 맞습니까?

신분제라는 것을 혹시 신라시대의 골품제도나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의미하는 무지몽매한 표현입니까?

맞습니다. 신라의 골품제도나 인도의 카스트 제도 분명히 신분이 세습됩니다.

그러나 신분제로서 이 제도의 핵심은 신분간의 이동을 엄격히 제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분이동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탈 받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였을 뿐입니다. 세습이란 부차적 산물일 뿐입니다.

교수님들께서는「..수습안이 목회직을 신분제처럼..」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그렇다면 수습안이 「목회직을 일반인들은 참여할 수 없는 특수계급으로 만들었다」는 의미로 밖에는 안 들립니다. 맞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이 수습안의 취지가 일반 성도들이 목회자가 될 수 없고 아버지나 조부가 목회자여야 목회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는 겁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 명성교회가 전임 목사님 자녀를 후임자로 선택했다 이 말입니까?

물론 이런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리라는 것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용어의 선택에는 신중을 기하셔야 합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적어도 신분제라는 표현은 적합지 않습니다. 후학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이 아니십니까.

바르게 사용하셔야지요. 적어도 지금 교수님들은 남의 교단, 남의 교회 일에 나서서 열을 내시는 중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침착하십시오. 제발.

두 번째로 묻습니다.

성명서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반하는.』.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장황한 형용사로 꾸미셨더군요. 현란한 표현도 곳곳에서 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교수님들,

정말 종교개혁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데요? 쉽게 가르쳐 주십시오

종교개혁의 참 정신이란, 저희 평신도의 생각으로는 상하 획일적인 천주교의 종교 제도로 인해 생긴 폐해를 막고자 수평적 개교회 존중과 개교회 의결기관의 존중이 중요한 정신이라고 알고 있는데 틀립니까? 특히 저희 장로교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수님들의 성명서에는 이 중요한 골자는 쏙 빠져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종교개혁 어느 조항에 『 개교회의 권한과 개교회 교인들의 설교 기본권을 간섭하여 찬탈해도 좋다』이런 조항이 있습니까?

꼭 좀 밝혀주시길 간청합니다. 교수님들이 보시기에 일천한 지식을 가진 평신도라 여기시면 가르쳐 주십시오.

불행한 일이지만 저희들의 눈으로는 지금 교수님들이 벌이시는 집단적 히스테릭을 보면

‘참으로 가여우신 분들이다’ 하는 생각만 듭니다.

저희 눈에는 광야에서 혼신을 다해 사냥하는 치이타의 뒤를 쫒아 그 강인한 턱과 이빨로 위협하여 먹이를 가로채는 하이에나의 비열하고 무지하고 염치없는 모습만 떠오르니 참 안타깝지요?

혹시 말입니다. 교수님들께서는 광야의 목회 경험이 얼마나 있으십니까?

목회현장이 이론으로만 통용되는 호락호락하신 곳인 줄 아십니까. 치이타가 사냥감을 향해 전력 질주할 때 숨이 가빠 죽을 수도 있다고 하네요. 지금 목회 현장의 목사님들은 이렇게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고 한 생명의 구원에 매달립니다.

정말 이 한심한 성명서에 동참이라도 하시려면 적어도 현장 목회의 아픔 정도는 체험해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세 번째  『명성교회가 축적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공모하는 김삼환 원로목사와 김하나 목사와 동조하는 당회와 교인들이..』 라고 하셨습니다. 이 대목에 와서는 말할 가치도 느끼지 못합니다. 정말 치졸한 이 표현에 치가 떨립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신학자 교수님들이 사용하실 수 있을까요? 시정잡배와 진배 없습니다.   명성교회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축적했다구요? 부끄럽지 않습니까?

이렇게 폄하하면 명성교회가 받은 은혜에 배 아프고 정신까지 혼미해 지시는 것이 좀 상쇄가 되십니까?  위로가 됩니까?

하지만 저희들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은혜는 지켜져야 합니다. 더 많은 어려운 이웃과 이 은혜를 나누고 함께 공유하기 위해 저희들은 목숨 걸고 지킬 것입니다.

더하여 공모와 동조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쓰셨더군요.

참 유치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이미 기울어진 시선으로 보니 모든 것이 이렇게만 보이겠죠. 공모는 ‘나쁜 일을 꾸민다’는 의미인 거 아시죠?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지킨다는 것이 나쁜 일이다? 그렇다면 교수님들은 사탄입니까? 하나님의 집을 분탕질하고 까 발려져야 시원한 이단들이나 아류 집단 입니까?

동조라구요? 명성교회 교인들이 동조했다고 하셨더군요? 동조란 ‘남의 주장에 자기의 의견을 일치시키거나 보조를 맞춤’ 이게 동조의 뜻 인 거 아시죠?

명성교회 교인 어느 누구가 남의 의견에 일치시켰습니까? 반대도 25%가 있었습니다.

75%의 찬성은 자신의 뜻과 의지였습니다. 전임목사님의 목회를 가장 잘 이어받을 사람을 청빙하는데 저희들은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한 겁니다. 저희는 반대 교인도 겸허히 인정했습니다. 교회를 떠나신 분도 있지만 대부분 남아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판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스스로 결정하여 선택한 것, 절대 포기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권력과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공모하고 동조했다?

이해합니다. 참으로 단순하시고 일차원적 사고를 지니신 분들이다 라고 생각하니까요.

권력과 부와 명예만을 지킨다면 그건 이미 교회로서의 사명을 버린 거지요.

하지만 명성교회는 이것을 지킬 겁니다. 왜 인줄 아십니까? 아직도 저희 주위에는 눈물과 기도와 도움이 필요한 우리 적은 이웃 형제 교회와 우리의 지원이 필요한 세계 곳곳의 선교현장과 우리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농어촌 교회가 수도 없이 많더군요. 죄송하지만 교수님들, 이분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그곳에 가셔서 한번 목회자님과 교인들 붙잡고 울며 기도라도 해 보신 적 있는 분 과연 얼마나 될까요

.

교수님들, 죄송하지만 저희 명성교회 한없이 약해요. 그러니 오해는 버리십시오.

총회에서 정해 준 규범대로 후임목사님을 청빙했음에도 규모가 크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세습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고 샌드백 두들기듯 돌아가며 저희 명성교회를 두들겨 팰 때도 저희 아프다는 소리 하나 지르지 않았습니다.

약하니까요. 그냥 참을 수 밖에 없었지요.

저희는 약할 때 강하다는 원로목사님의 말씀과 행동을 실제로 보고 느끼며 날마다 기적을 보고 살아온 교인들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저희들은 40년 동안 보고 느꼈기 때문에 두려울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이런 우리 교회가 당신들이 굳이 사용하길 원하시는 세습을 합당화하기 위해 총회를 매수했다고 주장합니다. 아~~ 교수님들은 그렇게 하시는군요.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런 매수나 협잡도 서슴치 않으시군요.

250만 통합교인과 2000명의 총대님들을 이렇게 모욕해도 되는 겁니까?

보고 또 봐도 이번 성명서는 기본도 안 갖추신 것입니다. 용어 선택부터 앞뒤가 안 맞는 오류가 천 가지가 넘습니다. 이것은 차차 밝히고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전임자의 목회철학을 잘 이어받은 후임목회자의 청빙인데 오직 부자지간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교수님들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스스로의 오류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솔직히요 교수님들.

교수님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혹시 닭살 돋는다고 저를 비하하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엘리 제사장도 아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 가문은 없어졌습니다. 사울왕에게는 특출한 아들 요나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모세에게도 아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 바톤을 넘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무리 아들이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혈연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렇게 하나님을 좁게 보셨습니까?

적어도 저희 명성교회 청빙에 혈연이란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 그것을 그렇게 부인하십니까 보시고도 모르시겠습니까 부와 명예를 물려주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신학자님들의 입에서 이런 허술한 말씀이 나옵니까

부와 명예..지붕위의 풀 같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정녕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르십니까? 좋습니다 교수님들의 주장대로 물려주었다 칩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요.

제발 이제 무의미한 논쟁, 아무 뜻 없고 공허한 메이리 같은 주장은 접으세요

생각과 사고가 다른 분들과의 대화가 이렇게 거대한 벽같이 느껴진다는 것을

요즘 들어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중 최근에 저는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원로목사님께서는 늘상 목회 현장을 스포츠와 비견하십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예가 다시 더 떠오릅니다.

바로 얼마 전 일입니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손흥민이 속한 토트넘과 에버턴의 경기였습니다. 이날 손흥민은 펄펄 날았습니다. 그런데 수비하던 중 상대편 고메스 선수에게 태클을 했고 고메스선수는 또 다른 토트넘 선수와 부딪혀 발목이 돌아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손흥민은 퇴장을 당했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며 미안함을 표시했습니다. 오히려 상대팀 선수들이 손흥민을 위로했습니다. 감동의 백미는 다음입니다. 경기 후 에버튼 주장 콜먼선수는 토트넘 라커룸으로 직접 찾아와 손흥민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이번에는 유럽 챔피언십 경기에서 우려 속에 손흥민이 출전하여 맹활약으로 상대팀 즈베즈다에 멀티골을 투하했습니다. 환호를 올릴 법한데 그는 카메라 앞에서 조용히 서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병상의 고메스 선수에게 미안함을 전했습니다

외신은 이렇게 전했더군요 ‘이런 남자를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목사님, 교수님. 요즘 살기 팍팍한 교인들에게 이런 감동 좀 주시면 안됩니까.

세상도 하는데 왜 저흰 안 될까요? 아니 세상이 못한 것을 저희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희들은 같은 필드에서 뛰는 스포츠맨입니다. 상대가 무너지고 아플 때 위로를 해주는 것이 진정한 스포츠맨십이라고 합니다. 아픈 상대 선수에게 달려들어 욕설을 하고 돌을 던지면 시원합디까? 이건 삼류 팀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저희 원로목사님은 평소 목회자나 교인이나 인성 품성을 주장하십니다. 원로목사님은 본인이 안동 김씨의 토속적 유교적 집안 출신임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어른 존중, 상대 배려라는 인성을 배웠기 때문이죠. 저희들은 믿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신학자 교수님들 인성과 품성을 확실히 갖춘 분들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아름다운 스포츠맨십을 목회라는 필드에서 펼칠 수 있는 일류 선수들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꼭 보여 주십시오. 화합과 배려와 위로의 모습 말입니다.

부족한 사람의 글, 혜량하여 주시길 바라며

명성교회 조그마한 교인 박태엽이 올립니다   19.11.8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