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 본 담임목사 청빙 (소기천 목사)

예장통합뉴스 | 기사입력 2019/01/06 [10:38]

성경으로 본 담임목사 청빙 (소기천 목사)

예장통합뉴스 | 입력 : 2019/01/0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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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보는 담임목사 청빙

소기천목사(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교수)

 

1. 교회의 결정이 우선이다.

신약성경에 교회라는 단어는 복음서 가운데 유일하게 마태복음에 3회 등장한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를 부르시고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16:18)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의 증인을 언급하시면서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8:17)고 하셨다. 이는 아주 준엄한 말씀이다. 지금 본 교단 안에 불신의 벽이 높아서 교회가 목사를 청빙한 것을 다수가 연대하여 부정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총회가 외면하는 세태가 되어 버렸다.

사도행전 1장에서 초기교회는 배반자 가룟 유다가 죽은 다음에 맛디아를 제비 뽑아 사도로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런 결정을 내린 주체가 교회이다. 사도행전 6장에서 예루살렘교회가 독자적인 결정으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6:3)을 선택한다. 사도행전 13장의 안디옥교회에는 선지자들과 교사들”(13:1)이 중심이 되어 단독으로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결정을 하기 전에, 바나바와 바울은 이미 동사목사로 세움을 받은 인물들이다.(11:20-26) 물론 이때에 안디옥교회에 온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기에(11:27), 안디옥교회의 출발은 예루살렘교회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가 개척된 것이다.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은 수행원인 요한(13:5)을 대동하여 최초의 이방인 선교사들로 파송을 받아 1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각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게 된다.(14) 전도의 결과로 안디옥교회는 두 사도를 따르는 자’(14:4)제자들’(14:20, 22)많은 사람을 제자’(14:21)로 삼게 되고, 급기야는 각 교회에서 장로들”(14:23, 참고 딛 1:5)을 선택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들은 오늘날의 장로뿐만이 아니라, 교회의 상주 직원인 목사를 염두에 둔 영적지도자들이란 의미이다. 이 모든 결정을 교회가 한 것이다.

교회가 먼저 세워졌나, 총회가 먼저인가? 교회가 먼저이다.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는 오늘날 총회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루살렘 공의회는 사도총회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총회가 바나바와 바울이 이방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고 각 교회에 영적인 지도자를 세운 결정을 그대로 존중하고 추인한 것이다. 그 목적은 무엇인가? 교회가 흥왕하고 든든하게 서가야 하기 때문이다.

 

2. 담임목사의 청빙은 계승이 성경적이다.

흔히 세간에 세습이란 단어가 유행어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법률적인 면에서 세습이란 혈연관계에 있는 비속[卑屬-아들이나 손자 등과 같이 혈연관계로 뒤따른 세대에 있는 자]이 존속[尊屬-부모 또는 부모와 동등 이상의 항렬에 속하는 혈족: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이 차지하고 있는 어떤 지위를 존속의 퇴임 또는 사망 시에 승계하는 것을 일컫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교회에서 세습이란 말과 족벌주의(친족중용주의)란 단어를 같은 뜻으로 사용되면서, 목사세습, 교회세습, 변칙세습(지교회세습, 교차세습, 다자간세습, 징검다리세습, 분리세습, 통합세습, 동서간세습, 쿠션세습, 담임목사 대물림 등)이란 용어를 하나로 묶어서 세습이란 단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성경에는 세습이나 승계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계승이란 단어가 성경적 원리의 근거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포플리즘에 입각하여 일방적으로 교직세습 반대라는 반성경적 주장을 하는 신학생들과 신학교 교수들이 보여준 시위는 시대적 사조와 경영 세습반대라는 사회적 환경에 이끌린 비성경적 태도이다.

소위 세습방지법은 세습을 반대하지만, 사실 세습은 성경적 용어가 아니다. 비상장 계열사를 넘긴 후 즉시 일감을 몰아준 다음에 비상장 계열사가 올린 수익으로 나머지 계열사들의 지분을 사들이도록 하여 증여세를 한 푼도 내지 않고 그룹의 지배력을 넘겨받게 하는 소위 경영 세습을 승계라고도 하는데 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계승이란 단어와 비슷한 말이라고만 명시되어 있으나, 오히려 계승은 조상의 전통이나 문화유산, 업적 따위를 물려받아 이어 나감이라고 정의함으로써 보다 더 심원하게 설명되어 있다. 사회용어인 세습과 경제용어인 승계와는 달리, 계승과 반차 혹은 계열이 성경에 직접 사용된 단어이므로 그 성경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교계나 한국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소위 세습이나 대물림이란 용어가 대기업 총수가 경영권을 자기 직계에게 물려주는 사회적 추세에 따른 비성경적인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본교단이 이런 부정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목회자의 세습을 반대하는 규칙을 통과시켰다.

교회는 누군가가 사임을 하면 아들이 아니더라도 그 뒤를 이어가는 것이 자명한 일이다. 이미 여러 교회가 후임자를 직계나 사위가 아닌 제3의 인물에 맡겨 후임목사직을 이어가게 하였지만, 심지어 몇몇 신학교의 교수출신들을 포함한 일부 목회자들이 제대로 검증된 목회감각을 발휘하지 못한 채로 부임하여 많은 소송과 불행한 일을 해당 교회가 스스로 자초한 일들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후임자들이 한번 자리를 꿰차면 그들 스스로가 자기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한 현실도 심각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 후임자와 전임자의 관계가 악화되어 볼썽사나운 소송 전에 휘말린 대형교회가 하나 둘이 아니다. 이 점에서 후임자에게 무조건 목회적 계승을 못하는 하는 것은 사실상 대안은 아니다.

문제는 세습과 대물림이 아니라, 한 교회를 평생 일구어 온 전임자에 이어서 목회를 흔들림 없이 이어가는 계속목회가 얼마나 성공적이냐가 새로운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세간에서는 심지어 구약학자들까지도 비성경적인 단어인 승계란 엉뚱한 단어도 사용하지만, 원래 성직은 계승이란 용례가 성경적인 단어이다.(대하 22:1; 45:16[17]; 16:19)

이 세 구절을 차례로 살펴보면, 먼저 역대하 221절은 아하시아가 왕위를 계승한 것(Akêl.m'b.)을 언급한다. 여기서는 군왕의 왕위계승에 연결된다. 이러한 왕위 계승을 70인역은 에바실류산(evbasi,leusan)으로 이해하여,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것에 적용한다.(2:22)

다음으로 시편 4516[17]절은 아들들이 조상들을 계승 곧 하야(hy"h') 함으로써 온 세계의 군왕을 삼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군왕을 계승하는 것은 70인역에서 에게네데산(evgenh,qhsa,n)으로 이해하여, 예수의 메시아직의 계승에 적용된다.(1:22; 1:38) 여기서 하야(hy"h')는 창세기 15, 7절에서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며” “그대로 되니라는 구절과 창세기 27절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담에게 생기를 불러 넣어서 생령 곧 네페쉬 하야(hY")x; vp,n<ï)생명이 계승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창조에 연결되는 단어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계승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예레미야 1619절은 조상들이 계승한바 곧 나할(lx;n")은 상속이란 의미로, 이는 허무하고 거짓되고 무익하다고 지적하면서 예레미야가 여러 번 언급한 헤벨(lb,h,Þ) 곧 바알 우상을 가리키는 것이다(2:5, 23; 8:19; 9:14[13]; 10:3, 8, 15; 14:22; 왕상 18:18, 21. 참고 2:8,11의 우상도 마찬가지이다) 히브리어 헤벨(lb,h,Þ)은 헬라어 70인역에서 우상(ei;dwla)으로 번역되어 신약성경에 영향을 미친다.(7:41; 고전 12:2; 9:20. 거짓 신으로서의 우상에 관해서는15:20; 2:22; 고전 8:4, 7; 10:19; 고후 6:16; 살전 1:9; 요일 5:21을 참고하라) 예레미야 25장에서는 우상을 허탄한 것’(lb,h,Þ)이라고 언급하면서 바로 이스라엘의 열조가 우상을 헛되이 행한 것곧 하발(lb,h,)이라고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바알 우상을 섬긴 것을 명확하게 비판한다. 이는 계승을 잘못하면 우상까지도 상속할 수 있다는 경고이다.

이렇게 세 가지로 사용된 계승이란 용어는 과거 유대 전통에서 왕이나 제사장직의 계승이나 현재 한국교회에서 화두로 부상한 후임목사직의 계승에도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단어들이다.

 

3. 영혼의 목자를 따르는 끄트머리 종과 십자가의 종

베드로전서 225절은 참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해주고 있다. 베드로는 성도와 예수님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표현한다. 이것은 당시 참 목자가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마음을 잡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길이신 것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베드로는 구약에서 이사야와 에스겔 선지자가 성도를 양으로 비유한 것을 착안하여 이렇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베드로전서 5장의 장로들을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포이메노스(poime,noj)인 목자와 에피스코포스(evpi,skopoj)인 감독으로 연결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된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 베드로는 목자나 감독이란 용어를 거의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을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예수님과 긴밀하게 연결을 짓고 싶어 한다. 곧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벧전 5:4)으로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목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엄밀히 말하면 목사는 목자가 아니며, 예수님만이 목자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을 목자장이라 칭하면서 목사가 참 목자가 되기를 소원하다보니 목자라 칭하는 일이 일반화된 것이다. 베드로는 이 같은 사실을 잘 터득하고 있기에 예수님을 목자장으로 모시면서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시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예수님을 목자장으로 부르면서 그분을 따르는 자신을 오늘날의 장로와는 다른 의미로 당시 교회의 대표자로서 영적 지도자인 프로스뷔테로스(presbu,teroj), 곧 장로인 베드로 자신의 영적 지도력을 목자장이신 예수님 아래에 놓음으로써 자신에게 목자와 감독의 지위를 주어 그 위상을 강화하려는 의도처럼 보인다.목사직의 기원에 대해 현재 교회에서는 교회를 성전으로 목사를 제사장 혹은 레위인으로 교인과 구별된 존재로 많은 교인이 구별되어 각자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란 인식이 있다. 이는 교인 스스로 인식한 것이 아니고 교육의 결과이다.

베드로는 이와는 다르게 목사직의 기원을 모든 양들의 목자장이신 예수님께로 둔다. 피조된 사람이 목사로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역할을 모델로 하면 교인과는 구별되지만, 하나님과 일반신자 사이에서 말씀 운반의 사역을 감당하는 존재로서 양된 신자들을 돌보는 제사장보다 더 귀한 직분을 받은 구별된 존재로 여겨질 수 있다. 이로써 장로는 지혜로운 그리고 존경받는 어른으로,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교인을 돌보는 역할을 맡은 자인 사역자와 종으로 섬기는 자의 위치를 잘 감당할 때 이것이 오늘의 교회공동체가 지향해야할 성경적인 직제의 모습이다.

더구나 베드로전서 5장은 그리스도의 양 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양 무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의 역할과 더불어, 교회와 성도의 모든 삶과 예배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는 교회론이 함축되어 있다.이 양 무리는 비록 하나님의 양 무리이지만, 그들을 치는 목자가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하나님의 양을 치는 목자들의 대장인 목자장은 당연히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를 따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목자들이 교회에 있어야 한다.

이상과 같이 교회에는 양 무리를 이끌어나갈 목자가 반드시 필요하며,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더러운 이득이 아니라, 기꺼이 맡은 목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베드로전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성경적인 직제론이다. 그럼 목자장이 그리스도라면 함께 장로된 자인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의 감독 하에 있는 목자가 된다.이로써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부터 줄기차게 주장해온 영적 지도자의 직책을 마무리 지으면서 자신을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의 감독 하에 놓여있는 목자로 그 위상을 견고하게 만들어 놓는다. 이런 베드로의 확신은 자신이 목자로서 그 직책을 감당한다는 사실을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4)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리라”(벧전 5:6)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드러낸다.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참 목자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사를 위임목사로 부르신다. 그가 참 목자요 목자장이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따르는 제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위상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그리스도와 비교해 볼 때, 베드로전서 218절의 종들은 비록 한 가정에서 가족처럼 지내지만 분명히 그 신분에 있어서 엄격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종은 여전히 종일뿐이다. 이 점에서 모든 목사는 목자장이신 예수님께서 지교회의 위임목사로 세우신다고 해도 여전히 종일뿐이라는 사실을 명시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41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종인 휘페레타스(u`phre,taj)의 원형인 휘페레테스(u`phre,thj)는 전치사 아래라는 뜻의 휘포(u`po,)와 명사 노를 젓는 이라는 뜻의 에레테스(evre,thj)의 합성어로 배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종처럼 아무런 권한이나 사회적 지위 없이 그저 낮은 자세로 섬기는 종들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끄트머리 종이라고 해서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천상천하 유아독존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처음부처 끝까지 종을 주관하시는 분은 그를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충성해야 한다. 흔히 한국교회에서는 기도를 드릴 때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자주 드리지만, 엄밀히 말해서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종은 머리가 아니라 꼬리가 되게 해달라는 겸손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교회를 개척하고 매일같이 무릎을 꿇고 세운 새벽기도의 제단과 지역사회를 섬기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지난 수십년을 시무해온 원로목사의 희생과 헌신에 비교하면, 후임목사는 거저 지교회의 위임목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후임목사는 자신이 위임목사의 자격이 있다고 절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나는 아무 자격도 없이 그 크신 은혜로 후임목사직에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와 같이 배 밑바닥에서 죽을 때까지 노를 젓는 종의 심정으로 끄트머리 종의 자세를 가지고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한국교회에 큰 유산을 남기면서 놀라운 희생의 길을 걸어간 서서평은 목회가 섬김이라는 사실을 몸소 실천한 순교자이다. 목사직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교사 등과 함께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시는”(4:11)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이다. 이런 태도는 그 누구보다도 지교회의 후임자로 청빙을 받은 위임목사가 명심해야 할 일이다.

사실 자격으로 말하면 그 누구라도 쉽사리 전임목사를 뒤이을 적합한 인물이라고 나설 수 없다. 과연 아들에게 돌고 돌아서 후임목사로 청빙이 된 상황에서 큰 혼란 없이 계속목회를 이어갈 수 있을지 걱정하고 기도하면서 책임을 감당할 자세로 자기에게 후임자리만 계승된 것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엄청난 상속처럼 계승된 사유재산과 종교권력과도 맞설 수 있어야 한다. 한 교회를 수십 년 섬긴 담임목사를 원로목사로 추대한 이후에 청빙위원회가 여러 가능성을 놓고 후임자를 물색한 것이 사실이지만, 결론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아들로 후임청빙이 이뤄진 경우가 많다.우선 부친과의 천륜은 끊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현직 위임목사로서 아버지가 남긴 구습을 철저히 타파하고 비느하스처럼 잘못과 죄를 철저히 바로잡는 새로운 교회개혁을 이루려는데 온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개혁교회는 당시 거대한 권력이던 로마 천주교의 부패한 교황청과 성당에 맞선 저항정신을 통해 오직 성경을 기치로 지난 500년 동안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 교회를 세워왔다. 개혁교회는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가지고 교회 안팎에서 불어 닥치는 폭풍한설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다시 본질인 오직 성경과 오직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서 그 누구(원로목사)도 또한 그 어떤 것(지교회의 재산)도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인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전파하기 위해서 기득권을 포기하고 동시에 십자가를 지신 주님처럼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cruciform’이라는 영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십자가를 지는을 의미하는 형용사이고, ‘cruciformity’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이 단어 그대로 전임자이든 후임자이든 목회를 계승한 위임목사는 공통적인 특징 하나가 있다. 그것은 그에게 영적인 직무를 맡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십자가를 지는 삶을 계승해야지 조금이라도 특권이나 권한을 계승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직 십자가를 지는 삶만이 위임목사에게 필요한 모습이다.

 

4. 104회 총회 헌의안

1) 악법은 법이기에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악법이므로 제104회 총회는 소위 세습방지법을 폐지할 것을 청원한다.

2) 부목사가 담임목사로 위임받지 못하도록 한 소위 부목사 청빙금지안도 성경이 가르치는 목회 계승의 차원에서 악법이므로 폐지할 것을 청원한다.

 

(제안 설명)

위의 두 가지 헌의안은 모두 동일한 성격의 청원이다. 존속과 비속의 목회 계승과 부목사의 담임목사 목회 계승은 장로정치 제도에서 청빙제도를 중시하는 지교회의 청빙절차에 의해 후임목사를 선택하는 교유한 권리이다. 이러한 권리를 총회가 상급기관이라 하여 성경적 원리를 무시하고, 간섭하고, 더 나아가서 강압적으로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인 사회적 경영 세습을 반대하는 것과 같은 잘못된 규정을 만들어서 지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급기야는 신학생들과 신학교 교수들까지 나서서 특정 교회를 비난하는 일이 사회적 포플리즘에 편승하여 다반사처럼 되어 버린 것이 현재 한국교회의 비극적인 모습이다.

성경은 세습이란 단어 대신에 계승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제사장의 계승을 오랜 미덕과 전통으로 가르치고 있다. 감독제도에나 통용될 법한 세습방지법을 조직신학 교수 출신인 어느 대형교회 목사의 세습방지법에 대해 감리교가 안타를 쳤으니, 우리가 이 법을 제정하면 홈런을 치는 것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본교단이 성경적 원리도 치밀하게 검토하지 못한 채로 세습방지법을 제정한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제 교인수도 감소하고 신학교 지원자도 현격하게 줄어서 미달사태로 이어지는 마당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104회 총회는 성경적인 근거도 없는 세습방지법을 폐지하고, 종전대로 지교회가 목회적 계승을 원만하게 민주적 청빙절차에 따라 선택한 권리를 존중하여 지교회를 살리고 한국교회를 살리는 대승적인 결단을 내려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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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눈에 안경 2019/03/28 [16:15] 수정 | 삭제
  • 아직 용어가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네요 북한 3대 세습 북한 인권유린 심각합니다.
  • 왕눈이 2019/03/23 [15:00] 수정 | 삭제
  • 용어 정립 님!
    북한은 왜 세습이라 하나요?
    그들도 체육관에 모여서 추대라는 형식을 하던데요.
    민주적 절차를 밟으면 세습이라 하면 안된다면서요..
    그리고 교회는 계승이라 한다면 교회목회가 가업인가요?
    계승을"선대의 업적, 유산, 전통, 지위 따위를 물려받아 이어 나감"이라
    사전은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용어정립님 답해보시죠?
    세습이나 승계, 계승 모두 본질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의미입니다.
    지난 세대의 힘과 권력을 자식이기에 이어 받는다는 점에서 말이죠!
  • 용어정립 2019/03/18 [04:11] 수정 | 삭제
  • 북한은 세습 기업은 승계 교회는 계승 용어를 잘 알고 사용해야죠
  • 억지주장 2019/03/18 [03:56] 수정 | 삭제
  • 이도형님 교회를 세우기보다 포도원담장을 허는 주장이네요 세습반대하면서 왜 북괴 3대 세습 사악한 정권은 바판하지 않나요. 교회를 허무는 주장입니다
  • 이도형 2019/03/16 [20:54] 수정 | 삭제
  • 소기천 교수께 강의들은 사람으로서 실망스럽네요. 대형교회 목사직 대물림을 경계하는 총회 결정의도를 모르시지는 않을텐데 굳이 성경에 세습은 없고 계승은 있다고 장황하게 말하는지 안스럽습니다. 또 하나는 교회가 민주적 절차로 청빙했다 하시는데 대형교회의 분위기가 과연 민주적 절차를 따를수 있다고 생각하시나보죠? 순수하신건지 ᆢ한건지~ 그럼 기업이나 북한도 계승이라 해야하겠네요. 그들 나름대로 민주적 절차를 밟은거니까요.
  • 교회개혁 2019/02/13 [09:50] 수정 | 삭제
  • 담임목사 청빙은 성경대로 계승이 원칙이므로 지교회의 청빙결정을 존중해야~~~
  • 성령충만 2019/01/09 [11:17] 수정 | 삭제
  • 통합교단과 장신대를 수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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